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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 - 가치없는 삶도 있을까

by qkekquf 2022. 4. 19.

영화 조커를 오랜 망설임 끝에 봤다. 보기 힘든 장면이 있을 것 같은 영화는 잘 못 봐서 한창 화제가 되었을 때도 보기를 피했었는데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가 어떨지 너무 궁금해서 용기를 내서 보았다. 일단은 전혀 다른 내용이지만 느낌으로만 봤을 때는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처럼 많이 슬프고 먹먹한 느낌이었다.

 

영화-조커-포스터-광대로-분장한-호아킨피닉스
영화 조커

우리는 아서에게 친절할 수 없었을까?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한동안은 힘이 없고 만만해 보이는 아서를 주변 사람들이 괴롭히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1980년대 고담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 조커의 초반 주요 이미지는 어두운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는 주인공과 그 주변에 있는 쓰레기들이다.

 

광대 분장을 하는 아서는 웃는 연습을 하고 있지만 우는 것 같다. 망하기 직전의 레코드샵의 행사를 하는 아서를 동네 불량한 아이들이 광고판을 뺏고 구타한다. 사장은 아서의 말을 듣지 않고 비아냥거리며 광고판 값을 월급에서 깎겠다고 한다.

 

버스에서는 앞에 앉은 아이가 자꾸 쳐다보길래 웃겨줬더니 그 엄마가 괴롭히지 말라고 소리를 지른다. 버스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리는 아서는 상황과 관계없이 갑작스럽게 웃음이 터져 나오는 병이 있다고 쓰여 있는 종이를 아이 엄마에게 건넨다.

 

아서는 국가에서 지원하는 기관에서 무료로 심리 상담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상담사는 화가 난 듯 그의 일기장을 펼쳐볼 뿐 공감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인다. 상담사가 펼쳐본 아서의 일기장에는 '내 죽음이 내 삶보다 가취 있기를'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는데 이 말은 영화의 중간, 마지막에도 나온다. 아무런 희망 없이 살다 보면 가치 있는 죽음이 그 희망을 대신하기도 할까 싶다.

 

조커로 변하는 아서

아서는 아동병원 행사에서 실수를 해서 직장을 잃고 만다. 그 과정에서 믿었던 친구의 배신은 그를 더욱 힘들게 한다. 그는 누군가를 배신하거나 이용하지 못하는 성격이기에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다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아서는 직장을 잃고 광대 분장을 그대로 한채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는 길에 웃음병으로 인해 남자 셋의 괴롭힘을 당하다가 폭발하고 만다. 그리고 공중화장실로 가서 춤을 추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아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아서는 심리상담사에게 자신의 얘기를 해보지만 여전히 그녀는 사무적일 뿐이고 지원이 끊겨서 이제 더 이상 약도 탈 수 없다고 한다. 이쯤 되면 아서가 광인이 되는 것은 스스로 선택했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그리 되었다는 것에 더 공감이 간다.

 

약이 끊겨서 그런 것인지 아서의 망상은 심해지고 엄마와 자신의 관계의 비밀을 알게 된 후 정말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으로 바뀐다. 그의 화는 자신을 이용했거나 함부로 대했던 사람들에게 향하고 그를 따라서 광대 분장을 한 시위대들도 더 과격해진다.

 

아서는 우여곡절 끝에 코미디언의 꿈을 갖고 롤모델로 삼았던 머레이 프랭클린의 쇼에 출연하게 된다. 머레이는 아서가 직접 나온 자리에서까지 그의 동영상을 틀며 웃음거리로 만들어 소개를 한다. 그리고 아서는 머레이에게 세상이 뭐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면서 상대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다고 말한다.

 

살면서 중요한 게 무엇일까

영화 조커를 보면서 다시 한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사회에서 평범하게라도 살아내려면 일단 돈을 벌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아야 한다. 만약 돈도 없고 장애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면 대부분은 아서 같은 대우를 받는다. 버스를 타도 길을 걸어도 카페에 들어가도 대부분 불친절한 눈빛과 언행을 마주해야 한다.

 

물론 어떤 이유에서든 직접적인 해를 가하는 것은 가장 막아야 하는 일이지만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들도 막아 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영화를 보면서 왜 심리상담사는 아서의 말을 듣기 싫어하면서 그 직업을 택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머레이 쇼의 방청객들은 아서의 동영상을 틀며 조롱하는 사회자의 농담에 왜 웃어줄까 싶었다. 아서는 진심이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배려만이라도 갖춘 이웃과 가족이 필요했을 수 있는데 안타깝다. 그리고 얼마든지 나도 불친절한 이웃이 될 수도 치워졌으면 좋을 이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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